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세르비아의 왕으로, 국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아들이었다. 1321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으며, 자신의 시력 회복을 주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어 1322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들 스테판 두샨을 후계자로 삼고 제타를 봉토로 주었으며, 콘스탄틴, 스테판 브라디슬라프 2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했다. 불가리아와의 벨바즈드 전투에서 승리하여 발칸 반도의 세력 균형을 바꾸었으나,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즈베찬 요새에 유폐된 후 사망했다. 그는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을 건설했으며,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네마니치 왕조 - 스테판 네마냐
스테판 네마냐는 12세기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세르비아를 통일하고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으며, 아들 성 사바와 함께 세르비아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정교회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 네마니치 왕조 -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네마니치 왕조 출신으로 세르비아 왕(1331-1355)이자 세르비아 제국 차르(1346-)로서 동로마 제국 영토를 정복하여 세르비아를 발칸 반도 최강국으로 만들고 두샨 법전을 반포하며 세르비아 정교회를 총대주교로 승격시키는 등 영향력을 행사했다. - 1331년 사망 - 아라트나다라
아라트나다라는 원나라 문종의 아들로 연왕에 봉해지고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한 달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그의 가계는 끊어졌다. - 1331년 사망 - 오도릭
오도릭은 13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 14세기 초 아시아를 여행하며 다양한 지역을 탐험했고,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등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후 복자로 시복되었다. - 교사형된 사람 - 아타우알파
아타우알파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스페인 군대에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잉카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고, 오늘날 안데스 지역에서는 저항의 상징 또는 왕위를 찬탈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교사형된 사람 - 오스만 2세
오스만 2세는 아흐메트 1세의 아들로, 1618년부터 1622년까지 오스만 제국을 통치하며 제국 권력 강화와 군사 개혁을 시도했으나 예니체리의 반발로 살해당해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예니체리에 의해 처형된 술탄으로 기록되었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 |
---|---|
기본 정보 | |
![]() | |
존경 대상 | 동방 정교회 |
칭호 | 스테판 우로시 3세 크테토르 |
출생일 | 기원전 1276년경 |
사망일 | 1331년 11월 11일 |
사망 장소 | 즈베찬 성, 중세 세르비아 왕국 |
매장 장소 |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 |
통치 | |
재위 기간 | 1322년 ~ 1331년 |
즉위 | 모든 세르비아와 해안 지역의 왕 |
대관식 | 1322년 1월 6일 |
이전 통치자 | 스테판 콘스탄틴 |
다음 통치자 | 스테판 두샨 |
가족 | |
배우자 | (알 수 없음) 불가리아의 테오도라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
자녀 |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 시메온 우로시 옐레나 네마니치 슈비치 테오도라-에우도키야 |
왕가 | 네마니치 왕조 |
아버지 | 스테판 밀루틴 |
어머니 | 옐레나 |
종교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기타 | |
![]() |
2. 초기 생애와 추방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첫 번째 부인인 세르비아 귀족 옐레나의 아들로, 밀루틴이 1282년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의해 세르비아인과 타타르족 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측근들과 함께 노가이 칸의 골든 호드로 인질로 보내졌으며, 1299년 노가이 칸이 죽을 때까지 그의 궁정에 머물렀다.[1]
2. 1. 제타 통치와 반란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불가리아 공주 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불가리아 황제 게오르기 1세 테르테르이다.세르비아와 몽골 간의 우호 유지를 위해, 수행원과 함께 조치 울루스 서부의 유력자 노가이에게 인질로 맡겨졌으며, 1299년 노가이가 전사한 후 귀국했다. 제타[1] 통치를 맡았지만, 1314년 반란을 일으켰다.[2] 같은 해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빌린 아버지 우로시 2세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때 아버지에 의해 시력을 잃었지만, 완전히 실명하지는 않고 나중에 회복했다.
1317년 우로시 3세는 훔(:en:Zachlumia)의 주교 다니일로에게 아버지와의 중재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고, 이를 받은 다니일로는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모에게 우로시 2세에게 간청해 줄 것을 의뢰했다.[3]
1320년 우로시 3세는 귀국 허락을 받아 영지로 Budimlje(현재의 베라네)를 받았다.[3] 1321년 10월 29일 우로시 2세가 병사하자, 이복 형제인 제타의 지배자 스테판 콘스탄틴이 세르비아 왕위를 계승했다.[4]
2. 2. 콘스탄티노폴리스 망명과 귀환
1314년, 데찬스키는 아버지와 다투었고, 아버지는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눈을 멀게 했다. 데찬스키는 완전히 눈이 멀지 않았고, 아마도 전혀 눈이 멀지 않았을 것이다.[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데찬스키는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의 궁정에 있었는데, 이는 두 국가 간의 좋은 관계를 나타낸다.[2] 데찬스키는 훔의 주교였던 다닐로에게 편지를 써서 아버지에게 중재를 요청했다.[3] 다닐로는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딤에게 편지를 썼고, 니코딤은 밀루틴과 대화하여 아들을 소환하도록 설득했다. 1320년, 데찬스키는 세르비아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분봉령인 부짐레가 주어졌으며,[3] 그의 이복 형제 스테판 콘스탄틴은 제타를 소유했다.[4]3. 세르비아 왕 즉위
1321년 10월 29일 밀루틴이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다.[4] 콘스탄틴이 제타에서 왕으로 즉위했지만, 데찬스키는 자신의 시력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며 왕위를 দাবি했다. 세르비아 민중들은 이를 신의 징표로 여겨 그를 지지했다.[5]
1322년 1월 6일,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는 데찬스키를 왕으로 대관했고, 그의 아들 스테판 두샨을 젊은 왕으로 대관했다.[5] 데찬스키는 두샨에게 제타를 봉토로 주어 후계자로 지명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4]
한편, 데찬스키의 사촌 스테판 브라디슬라프 2세 역시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이 계속되었다. 브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 등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장했지만, 결국 1324년 말 전투에서 패배하여 헝가리로 도망쳤다.[6]
이후 데찬스키는 사바 강, 도나우 강 연안까지 북방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헝가리에 의해 저지되었다.[7] 두브로브니크와의 관계는 긴장과 화해를 반복했다. 1325년에는 세르비아 귀족 보이인이 두브로브니크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데찬스키는 대체로 두브로브니크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와의 관계로 인해 훔 지역을 상실하는 등 영토 문제도 발생했다.[8]
데찬스키는 비잔틴 제국 내전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이후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비잔틴 제국과 대립했다. 1330년 벨바즈드 전투에서 불가리아의 미하일 아센 3세를 격파하고 죽임으로써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3. 1. 왕위 계승 분쟁
밀루틴이 1321년 10월 29일 사망하면서 상속에 대한 명확한 지시를 남기지 않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4] 콘스탄틴이 제타에서 왕으로 즉위했지만, 데찬스키와 그의 사촌 스테판 브라디슬라프 2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이 일어났다.[4] 데찬스키는 자신의 시력이 온전함을 보이며 기적이라고 주장했고, 민중들은 이를 신의 징표로 여겨 그를 지지했다.[5] 1322년 1월 6일,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는 데찬스키를 왕으로, 그의 아들 스테판 두샨을 젊은 왕으로 대관했다.[5] 데찬스키는 이후 두샨에게 제타를 봉토로 주어 후계자로 삼을 의도를 명확히 했다.[4] 데찬스키는 콘스탄틴에게 왕국 분할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제타를 침공하여 콘스탄틴을 패배시키고 살해했다.[4]

한편, 브라디슬라프 2세는 밀루틴의 사망으로 투옥에서 풀려나 시르미아의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또한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하며 루드니크에서 지지를 얻었다.[4] 헝가리, 불가리아, 보스니아의 지원을 받은 브라디슬라프는 시르미아를 장악하고 데찬스키와의 전투를 준비했다.[4]
1323년 데찬스키와 브라디슬라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1323년 말, 데찬스키 측이 루드니크 시장을 점령하자 브라디슬라프는 북쪽으로 도망쳤다.[4] 라구사 상인 멘체를 비롯한 브라디슬라프 지지자들은 오스트로비차 요새로 피신하여 저항했다.[4] 데찬스키는 두브로브니크(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이를 거부했다.[4] 1324년, 데찬스키는 라구사 상인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지만, 그 해 말 루드니크를 되찾은 후 상인들을 석방하고 재산을 돌려주었다. 브라디슬라프는 1324년 말 전투에서 패배하여 헝가리로 도망쳤다.[6]
두브로브니크와 세르비아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1325년 8월 보이보다 보이인이 두브로브니크를 약탈하여 잠시 무역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4] 1326년 3월 25일 데찬스키는 밀루틴이 라구사에 부여한 특권을 재확인했다.[4] 1326년 후반, 두브로브니크와 보스니아의 반 스테판 2세가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긴장이 다시 고조되었고, 세르비아는 훔 지역을 보스니아에게 잃었다.[4]
4. 통치와 업적
밀루틴은 1321년 10월 29일 사망하면서 상속에 대한 명확한 지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제타에서 왕으로 즉위했지만, 데찬스키와 그의 사촌 스테판 브라디슬라프 2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이 발발했다. 데찬스키는 자신의 시력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322년 1월 6일,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는 데찬스키를 왕으로, 그의 아들 스테판 두샨을 젊은 왕으로 대관했다. 데찬스키는 이후 두샨에게 제타를 봉토로 주어 후계자로 삼을 의도를 보였다. 기록에 따르면 데찬스키는 콘스탄틴에게 왕국 분할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제타를 침공하여 콘스탄틴을 패배시키고 죽였다.
한편, 브라디슬라프 2세는 밀루틴의 사망으로 투옥에서 풀려나 시르미아의 왕위를 되찾고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했다. 그는 헝가리, 불가리아, 보스니아의 지원을 받아 시르미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데찬스키와 전투를 준비했다. 1323년 데찬스키와 브라디슬라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브라디슬라프는 루드니크를 점령했지만, 1323년 말 데찬스키에게 빼앗기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브라디슬라프의 지지자들은 오스트로비차 요새로 피신하여 저항했지만, 데찬스키는 두브로브니크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항의했다. 두브로브니크는 이를 거부했고, 데찬스키는 1324년 라구사 상인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해 말 루드니크는 데찬스키에게 반환되었고, 그는 상인들을 석방하고 재산을 돌려주었다. 브라디슬라프는 1324년 말 전투에서 패배하여 헝가리로 도망쳤다. 두브로브니크와 세르비아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고, 1325년 8월 보이보다 보이인이 두브로브니크를 약탈하여 잠시 무역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1326년 3월 25일 데찬스키는 밀루틴이 라구사에 부여한 특권을 재확인했다.
1326년 후반, 두브로브니크와 보스니아의 반 스테판 2세가 브라니보예비치 가문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긴장이 다시 시작되었고, 세르비아는 훔 지역을 보스니아에게 잃었다.
데찬스키는 비잔틴 내전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와 동맹을 유지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가 권력을 잡자, 불가리아의 미하일 아센 3세와 동맹을 맺었다.[7] 미하일 아센 3세는 데찬스키의 누이 안나와 이혼하고 비잔틴 공주와 결혼했다.[9]
이후 데찬스키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스테판 두샨을 지지하여 그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1331년, 두샨은 스카다르에서 네로디믈레로 와서 데찬스키를 전복시켰고, 데찬스키는 페트리치로 도망쳤다. 1331년 8월 21일, 두샨은 포위 공격 후 페트리치를 점령하고 그의 아버지를 즈베찬 요새에 투옥했는데, 그곳에서 1331년 11월 11일에 사망했다.[15]
4. 1. 벨버즈드 전투와 발칸 반도의 세력 재편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비잔틴 제국의 내전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와 동맹을 유지했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권력을 잡자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와 동맹을 맺었다.[7] 미하일 아센 3세는 데찬스키의 누이 안나와 이혼하고 비잔틴 공주와 결혼했다.[9] 1329년 봄,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고,[9] 1330년 불가리아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등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데찬스키는 벨바즈드 전투에서 미하일 아센 3세를 격파하고 죽임으로써[11][12] 세르비아의 발칸 반도 내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13] 이 전투에서 스테판 두샨도 큰 공을 세웠다.[14]미하일 아센 3세의 패배 소식을 들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퇴각했다.[12] 데찬스키는 이후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13]
4. 2.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 건설
5. 폐위와 죽음
두샨이 왕위에 오른 후, 스테판 우로시 3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즈베찬 성(:en:Zvečan Fortress)에 유폐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살되었다.[13][15]
5. 1. 귀족들의 불만과 쿠데타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프릴레프 요새를 점령하여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7], 우로시 3세 앞에는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의 동맹이라는 큰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1324년경부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9], 우로시 3세의 매제인 불가리아 황제 미하일 3세 시쉬만은 우로시 3세의 여동생 안나 네다(:en:Anna Neda of Serbia)와 이혼하고 비잔틴 제국에서 공주를 맞이했다. 1329년 봄에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로 진출하는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화약을 맺었고[9], 1330년 봄에 불가리아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조치 울루스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세르비아 역시 두브로브니크의 중재로 카탈루냐 용병을 고용했다[10]。 같은 해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고, 우로시 3세는 자신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을 맞이했다. 7월 28일 벨부즈드 전투[11]에서 불가리아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세를 펼쳐 대승을 거두었고[12],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미하일 3세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3]。 동유럽사 연구가 G.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벨부즈드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발칸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14]。정세를 살피던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맹국의 패전을 알게 되자 아드리아노플로 퇴각했다[12]。 세르비아군은 추격전을 통해 손쉽게 전리품을 얻었고,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우로시 3세는 불가리아에서 여동생 안나를 지원하여 안나의 아들 이반 스테판을 제위에 앉혔다[13]。 그러나 우로시 3세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두샨이 왕으로 옹립되었다[13]。 폐위된 우로시 3세는 즈베찬 성(:en:Zvečan Fortress)에 유폐되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살되었다[15]。
5. 2. 유폐와 의문의 죽음
1324년경부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9], 우로시 3세의 매제인 불가리아 황제 미하일 3세 시쉬만은 우로시 3세의 여동생 안나 네다(:en:Anna Neda of Serbia)와 이혼하고 비잔틴 제국에서 공주를 맞이했다. 1329년 봄,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로 진출하는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화약을 맺었고[9], 1330년 봄, 불가리아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조치 울루스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세르비아 역시 두브로브니크의 중재로 카탈루냐 용병을 고용했다[10]。 같은 해,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고, 우로시 3세는 자신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을 맞이했다. 7월 28일 벨부즈드 전투[11]에서 불가리아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공세를 펼쳐 대승을 거두었고[12],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미하일 3세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3]。 동유럽사 연구가 G.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벨부즈드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발칸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14]。정세를 살피던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맹국의 패전을 알게 되자 아드리아노플로 퇴각했다[12]。 세르비아군은 추격전을 통해 손쉽게 전리품을 얻었고,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우로시 3세는 불가리아에서 여동생 안나를 지원하여 안나의 아들 이반 스테판을 제위에 앉혔다[13]。 그러나 우로시 3세는 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 두샨이 왕으로 옹립되었다[13]。 폐위된 우로시 3세는 즈베찬 성(:en:Zvečan Fortress)에 유폐되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살되었다[15]。
6. 사후 평가와 유산
데찬스키는 서사시에서 고귀한 인물로 여겨지며,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14] 그의 축일은 11월 11일(구력)이며, 이는 11월 24일(신력)에 해당한다.[14] 그는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14]
6. 1. 세르비아 정교회의 성인 추대
세르비아 정교회는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성인으로 추대했으며, 서사시에서 그는 고귀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축일은 11월 11일(구력)이며, 이는 11월 24일(신력)에 해당한다. 그는 메토히야 지역에 위치한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을 건설했으며, 그의 유해는 이 수도원의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6. 2. 문화적 유산
데찬스키는 서사시에서 고귀한 인물로 여겨지며, 세르비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다.[14] 그의 축일은 11월 11일(구력)이며, 이는 11월 24일(신력)에 해당한다.[14] 그는 자신이 건설한 비소키 데차니 수도원 교회에 안치되어 있으며, 해당 수도원은 메토히야 지역에 위치해 있다.[14]참조
[1]
문서
現在のモンテネグロ南部の地域。この地域にはセルビア帝国崩壊後にゼタ公国(:en:Lordship of Zeta)が成立する。
[2]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3]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4]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5]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6]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7]
서적
ユーゴスラヴィア史
[8]
논문
中世のバルカン
[9]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0]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1]
문서
ヴェルブジュドは、現在キュステンディルの名で知られている。
[12]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13]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14]
논문
中世のバルカン
[15]
서적
East Central Europe in the Middle Ages, 1000-15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